뉴타운 사잇길을 달리며

08 June 2019


평소에 하지도 않던 조깅을 6km나 뛰고 온 날이 있었다. 평소 하지도 않던 조깅을 급작스럽게 나간 건, 곧 있을 건강검진의 문진표를 작성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난하게 이런저런 항목들을 체크해 나가던 내 손을 멈추게 만든 두 가지 질문이 있었으니. 바로 ‘일주일에 숨이 찰 정도의 운동을 몇 회나 합니까?’라는 항목과 ‘일주일에 음주를 몇 번 정도 합니까?’ 항목이었다. 당시엔 여행을 간다는 핑계로 한 달 째 아무 운동도 안 하고 있는 상태였고, 워낙 술을 좋아해 일주일에 세네번은 집에서 하이볼이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솔직하게 체크하자니 스스로가 엄청나게 게으른 알코올 중독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자신을 속이며 운동 항목에는 주 2회라고, 음주 항목에는 주 3회라고 체크해버렸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들어 ‘건강검진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이 대답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오랜만에 날씨도 선선하고 좋아서 근처로 조깅을 나갔다. 내가 가끔 찾아갔던 공원은 엄청난 오르막길에 있는 집 뒤쪽 아파트촌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집 정면 방향으로는 멀리 나가본 적이 없었다. 마침 룸메이트가 ‘그쪽 길이 참 깨끗하고 좋더라’ 고 말해주어 궁금해지기도 했고, 아파트 뒷편에 무려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아파트 쪽 길을 통해 청계천에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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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단적으로 다른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내가 사는 역 뒤쪽은 온통 울퉁불퉁하고, 뒤죽박죽이고, 낡고, 가난하고, 제멋대로 생겼다. 반면 역 건너편에는 마치 요새와 같은 대규모 뉴타운 아파트촌이 형성되어 있다. 매일 같은 달의 앞면만 보이는 것처럼, 내가 역과 집 사이를 다니며 본 것은 그 뉴타운 아파트촌의 가장 앞쪽 얼굴 뿐이었다. 조깅을 하며 처음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본 아파트촌은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1차부터 3차까지 나누어져 개발된 뉴타운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 같았다. 새로 깔린 보도블럭과 평평한 타일은 참 깨끗하고 걷기 편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본 적도 없던 발레 교습소나 필라테스 학원 간판이 많이 보였고, ‘부자 아빠’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동산 간판도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의 교회 건물들도 여럿 보였다. 내가 ‘우리 동네에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바랬던 깨끗하고 넓고 작업하기 좋은 카페들이 많았다. 아파트의 아래쪽에는 상가들이 줄지어 입점해있어서, 주말을 맞아 나온 연인들과 가족들이 고기를 굽고, 치킨을 뜯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간이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술 취한 아저씨나 고성을 지르는 젊은이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차분하고 행복해 보였고,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야말로 뭐랄까, 나라에서 제시하는 <4인 가족의 행복도 게이지>라는 게 있다면 아파트촌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 게이지가 눈에 띄게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긴 나는 네이버 부동산을 켜서 아파트의 시세를 살펴봤다. 5억부터 7억 사이의 가격에 전세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1억짜리 전세면 보통 원룸 하나짜리니까, 새로 지은 아파트 전세에 그 정도 가격은 예상할 수 있었다. 1년에 5천만원씩 저금하면… 10년이 걸려 매매도 아니고 전세로 들어갈 수 있는 가격이었다. 내가 아까 걸어가면서 본 평범해 보이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저곳에서 살고 있는 걸까. 나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갑자기 그들이 완전히 다른 종족처럼 느껴졌다. 청계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이던 롯데캐슬은 그야말로 성 같아서, 일직선으로 한참을 걸어도 걸어도 왼쪽에는 롯데캐슬의 빵빵한 벽이 계속 시선 한구석에 걸렸다. 곳곳에 불이 켜진 층들을 보며 저런 곳에도 정말 누군가 입주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릴 적 TV광고에 나오는 상품이라면 뭐든지 언젠가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인 줄 알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순간 굉장히 찌릿하고 강렬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아, 무언가를 갖고 싶다, 저것을 누리고 싶다, 하는 감정.


걷거나 앉아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깨끗하고 넓은 공간에 있고 싶다. 몇천원의 돈으로 음료를 사 쾌적한 카페에 앉아있는 그런 짧은 즐거움 말고, 그런 공간을 아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밤에 술에 취한 사람들을 피해가며 걷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살고 싶다. 택배를 시키면 집주인에게 찾아가느라 눈치를 보지 않아도 관리실에서 받아주는 곳에 살고 싶다. 집주인이 에어컨 기사와 파이프 구멍을 어디에 뚫느냐로 싸우는 것을 중간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살고 싶다. 요리할 때 도마를 놓을 자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넓은 주방이 있는 곳에 살고 싶다. 환풍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요리할 때마다 모기가 들어올 걱정을 하며 문을 열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살고 싶다. 힘들게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는 곳에 살고 싶다.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새어 들어오지 않고, 아침에 쓰레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때문에 잠이 깨지 않도록 방음이 된 벽이 설치된 곳에 살고 싶다.


음악을 들으며 아파트촌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뛰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한참이나 했다. 그리고 엄마 생각을 했다. 엄마가 왜 그렇게나 아파트라는 존재에 집착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의 아파트를 향한 동경심은 지금의 내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어른이 됐나부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