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차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이직기

28 April 2025


작년 여름, 약 3년 9개월간 몸 담았던 우아한형제들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했다. 긴 과정을 통해 이직한만큼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이직 후 어느 정도 적용을 마친 시점에서 이직을 결심한 이유와 그 과정에서 배우고 깨달은 점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원래는 이직 직후에 글을 쓰려고 했는데 초고를 써놓고 발행을 하지않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 사실 입사 초반에는 회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니, 객관적으로 글을 쓰기에는 오히려 잘 된 일 같기도 하다.)


사랑하던 회사에서 이직을 생각하다

우아한형제들은 내가 여태까지 다녔던 회사 중 가장 길게 재직했던 곳이었고, 또 어떤 곳보다도 큰 애사심을 가졌던 곳이었다. 가끔 내 인스타그램을 보고 친구들이 ‘너는 회사를 어떻게 그렇게 재밌게 다니냐’고 물어봤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누가 봐도 좋은 환경과 문화를 가진 회사였기 때문에 이직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 32시간, 재택근무, 비포괄 임금제 등의 근무조건은 정말 매력적이었고, 3년 넘게 함께하며 정든 좋은 동료들과 익숙한 프로세스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켠에 계속 고민과 답답함이 늘어가고 있던 것 같다.

비즈니스의 방향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쌓였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과 회사가 생각하는 기준이 계속해서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투덜거리며 내 생각을 말하기도 하고,조직의 결정을 믿고 따라보기도 했지만 되돌아보면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의욕은 떨어지고 불만은 많아진, 예전과 달리 주어진 일만 그럭저럭 해내는 나 자신을 보게 됐다.

이전에 너무 회사에 진심을 다했기 때문일까. 그렇게 적당한 마음가짐으로 보내는 하루하루는 오히려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돌아보면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복지 좋은 회사가 또 어딨겠어?, ‘이직 준비는 또 언제 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좋은 복지가 오히려 날 붙잡아두는 족쇄가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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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형제들의 그 유명한 ‘송파구에서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의 마지막 11번은 ‘이끌거나, 따르거나, 떠나거나!”이다. 뭔가를 적극적으로 바꿔나가지도, 진심으로 따르지도 못하게 되었다면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직하고 싶은 나와 머물러 있고 싶은 내가 치열하게 싸운 끝에, 아직 배우면서 일할 수 있는 나이일 때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디자이너로서 내가 부족한 능력을 채울 수 있는 곳,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장기적으로도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고싶은 회사는 어떤 모습일까?

이직을 결심하고 나니 ‘어떤 회사에 가야 할까?’에 대해서도 한참 고민하게 됐다. 나에게 중요한 기준을 하나씩 점검해본 후, 크게 아래 세 가지 기준을 세우게 됐다.

  • 서비스의 쓸모에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곳: 아무리 근무 환경이 좋아도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서비스를 만든다면 일에 애정을 갖기 어렵다. 그래서 실제로 서비스의 유익성에 공감할 수 있고, 그 가치를 통해 비즈니스적으로도 성과를 내고 있는 회사에 가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 사용자가 많고 내가 직접 사용해본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 사용자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곳: 유저 인터뷰와 테스트가 일하는 프로세스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고, 리서치 결과가 실제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조직을 원했다. 기준이 사용자가 아닌 다른 곳에 있으면 나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디자인을 내보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그 디자인의 임팩트도 보통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 디자인 실무자에게 결정권이 있는 곳: 다른 팀과 협업할 때 디자인 피드백을 주고받지만, 최종 결정은 디자인팀이 책임지는 구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팀 안에서도 리더가 모든 걸 컨트롤하기보단, 실무자를 신뢰하고 자율적으로 맡겨주는 분위기를 원했다.

이런 기준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원할 회사를 좁힐 수 있었다. 쿠팡, 토스, 당근 세 곳이 최종 후보에 올랐고, 그중에서도 쿠팡을 1순위로 삼았다. ① 내가 실생활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서비스였고, ② 데이터 중심으로 일하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③ 재택근무 문화가 잘 자리 잡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동안 배워온 언어를 실제 업무에서 써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나름의 로망이 있어서, 영어를 많이 쓴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지원

2023년 11월에 처음으로 쿠팡에 지원했고, 포트폴리오 검토를 비교적 빠르게 통과한 후 과제를 받았다. 재직 중이라 과제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직접 유저 인터뷰를 진행하고 문제를 정의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워 꽤 신나서 진행했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져 최종적인 솔루션은 다소 급하게 마무리를 지었던 것 같다. 실제로 면접에서도 리서치에 대해선 긍정적인 피드백이 있었지만, 인사이트와 디자인 결과 간의 연결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면접에 대한 준비가 부족해 내 포트폴리오인데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하루에 세 번의 면접을 몰아본 끝에, 첫번째 지원에서는 최종적으로 탈락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탈락한 이후 오히려 쿠팡이라는 회사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면접관들이 던졌던 질문 하나하나가 인상 깊었고, 모든 질문에서 쿠팡의 리더십 원칙이 체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이 프로젝트는 어떤 유저의 문제에서 출발했는가?
  • 그것이 진짜 문제인지 어떻게 검증했는가?
  • 여러 디자인 솔루션 중 왜 이 시안을 선택했는가?
  • 이 디자인이 만든 임팩트는 무엇이었는가?
  • 그 임팩트는 정말 이 디자인 덕분이었는가?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이지만, 돌이켜보면 실무에서 위와 같은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한 적이 많지 않았다. 특히 디자인의 ‘결과’가 아닌 ‘문제정의’를 정량·정성 기반으로 접근한 경험은 부족했다. 반면 쿠팡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서비스를 만드는 조직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디자이너로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첫 지원 당시에는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의 마음가짐이었기에 간절함도 면접에 대한 대비도 부족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고, 면접에서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것이 많아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이후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들과 어떻게 답했으면 좋았을지를 복기하며 따로 정리해두었다. 그렇게 첫 번째 지원은 아쉬움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지원

약 4개월 뒤, 쿠팡에서 기존과는 다른 포지션 채용 공고가 새로 올라온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면접과 과제 모두 더욱 꼼꼼하게 준비했다. 내 프로젝트인데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복기하며,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결정의 이유들을 다시 적어보았다. 또 탑다운으로 내려온 프로젝트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풀어낼지, 여러 솔루션 중 특정 디자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문서로 정리하며 예상 질문에 대비했다. 과제 역시 지난번 피드백을 떠올리며 신경 써서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같은 부분에 대해 비슷한 피드백을 또 받았다. 다만 이번에는 “다시 진행한다면 이렇게 개선하겠다”는 식으로 추가적인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번 채용 과정은 첫 번째보다도 시간이 더 오래 소요되었기에 기다리는 동안 마음고생을 좀 했는데, 마지막엔 다행히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4개월 사이 실력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지원 경험 덕분에 쿠팡이 어떤 원칙에 따라 질문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조금 더 이해한 상태로 준비한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직 과정을 돌아보며

잘한 점

이번 이직 과정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가고 싶은 회사의 기준을 명확하게 세우고 최우선순위 회사에만 집중한 것이다. 동시에 여러 회사의 전형을 진행하면 시간과 에너지가 분산되기 쉽고, 그로 인해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이번 과정에서는 쿠팡에만 집중했고 그 덕분에 과제와 면접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할 수 있었다.

이직을 단순히 ‘현 직장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탈출구로 보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 더 성장할 수 있을까’를 기준 삼아 판단했던 것도 좋았다. 이상적인 회사를 미리 구체화한 덕분에 결정을 내릴 때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아쉬운 점

한편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아래와 같은 점들을 더 보완하고 싶다.

  • 사내 생산성 개선 프로젝트도 포트폴리오에 포함할 것 : 전직장에서 디자인 옵스로서 일하는 방식을 개선하거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시도들을 진행해왔지만, 이번 포트폴리오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면접에 들어가보니 이런 경험들 또한 중요하게 본다고 느꼈고, 다음에는 이 부분도 잘 정리해 포함할 예정이다.
  • 추측이 아닌 근거 기반의 포트폴리오를 만들 것 : 이번 면접에서 “무엇을 보고 이걸 문제라고 생각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보통 그렇잖아요’라는 식의 애매한 답변을 한 적이 있었다. 돌아보면 일부 케이스는 실제 관찰이나 데이터 없이 내 직관으로만 판단했던 것도 있었고, 그 점이 면접 과정에서 드러났다.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내용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더 꼼꼼히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 프로젝트의 시작점과 배경을 더 자세히 설명할 것 : 지금까지는 ‘결과 중심’의 스토리텔링에 치중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제 정의 과정과 출발점이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 포트폴리오에서는 지표 개선뿐 아니라, 그 지표를 왜 개선하려 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는지에 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할 계획이다.
  • 나의 디자인 사고방식을 복기하고 정리할 것 : 어떤 기준으로 디자인을 선택했는지, 레퍼런스나 데이터를 어디서 찾았는지, 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했는지, 갈등이 있었을 때는 어떻게 조율했는지 등등… 내가 실제로 일하는 방식에 대해 더 깊이 있게 돌아보고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면접이 끝난 후에야 이런 질문들에 대한 내 생각이 부족했다는 걸 실감했다.
  • 과신하지 않고, 처음부터 최선을 다할 것 : 링크드인 콜드메일이나 지인의 추천으로 지원을 하게 되면, 종종 ‘이 회사가 나를 원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원서를 넣는 그 순간부터는 ‘회사 → 나’의 관심이 아니라 ‘나 → 회사’로 주체가 바뀌고, 나 역시 수많은 지원자 중 하나가 된다. 나 또한 첫 지원 때 이 정도면 괜찮을거라는 마음으로 면접에 들어갔다가,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만 더 준비할 걸’이라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었다. 다음 기회에는 어떤 회사든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지 않고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싶다.

돌아보면 이번 이직에는 약 6개월 넘는 시간이 걸렸다. 2023년 11월, 쿠팡에 처음 지원서를 넣었고, 재지원 끝에 최종 입사를 확정 지은 건 2024년 6월 말이었다. 채용 시장이 얼어붙은 시기였고, 지원자 수도 많다 보니 중간중간 기다리는 시간도 길었다. 그 때 남긴 기록들을 다시 보니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꽤나 지치고 우울했는데, 결국 잘 맞는 곳으로 이직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입사해보니 쿠팡은 정말 우아한형제들과는 정반대의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와 잘 맞는 회사 같기도 하다. 또 내가 세웠던 세 가지 기준도 지금까지는 기대했던 만큼 충족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어, 한동안은 다시 이직 걱정 없이 즐겁게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듯 하다.

이직 과정은 분명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많은 걸 배운 시간이기도 했다. 현업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던 나의 시장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되짚어 볼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부족함과 강점도 더 명확히 보였다. 이번 이직 과정에 대한 기록이 미래의 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